소학의 본문을 인용해 보면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군주에게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한 것을 타고난 본성이라고 한다.
이것은 순리에 따라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사실 본문의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어버이를 사랑하고까지는 동의해도 나머지는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이런게 한 시대의 이야기지 타고난 본성이라고 할 수가 없죠.
고전을 읽을 때에는 항상 이런 것을 감안해서 읽어야 합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것은 진리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사실 그런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계가 있다고 의의까지 저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겠죠.
그리고 이게 바로 공부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배우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이런 사람을 비로소 깨어있는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다음으로 인용 할 이야기는 역시 중요한 이야기가 되는데요
내가 듣건대 경 이라는 한 글자는 성학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한다.
또 이런 것이 소학의 사회화도 이 경이 기초가 되는 것이고 대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이 경을 기초로 합니다.
대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총명함을 개발하여 덕으로 나아가 학업을 닦아서 명덕과 신민의 공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 방식으로는 대학은 성인 그러니까 만랩의 공부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 달에 한 번 삼천 배를 하는 어린 학생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는데 이것도 깨어있음을 지속하고 그 출력을 높이는 대표적인 한 방법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성학십도를 만든 퇴계는 어떤 경지에 있던 사람일까요? 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 있는데요.
서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일상 생활 속에서 지킨다면 중용과 조화 그리고 만물이 제자리에서 잘 길러지는 공덕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며 덕행이 인간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우주와 인간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의 경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이 천인합일은 사실 무협지에서 나올법한 말인데 이게 지금 왕에게 올리는 상소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천인합일은 전혀 허세가 아닌 것이죠.
그러면 최종적인 경지로서의 천인합일을 말한 것일까요?
아니면 이 천일합일 정도는 껌이다. 뭐 이런 뜻이 였을까요?
여기서 이 정도는 껌이다. 이런 뜻입니다. 응당 이 정도는 해야 된다.
그래야 비로소 상소에 담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최종적인 경지라면 천인합일을 언급한 퇴계가 바로 성인이란 의미인데 이러면 오만이 되어서
반대파에서 용납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한 경지입니다.
저같은 경우엔 이 경 깨어있음도 옛날에는 단전호흡이나 선도수련같은 것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라고
알고 생각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경이 메인이고 이런걸 더 잘하기 위해 만든 수단들이저것들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소학과 대학은 서로 의존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른바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당연한 것입니다.
일단 사회화가 되고 그리고 자기계발을 통해서 다시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고 그 표현이 사회의 순기능으로 다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여담이지만 왜 공자님은 인과 예를 주장했다고 교과서에서 전해질까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인은 우리 마음의 본 바탕이고 예는 우리의 삶에 표현인데 이것이 우리 본성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아도 신을 상정하고 있게 됩니다.
그런데 또 묘한게 불가에서는 무명이라는 것에 의해 즉 열두연기에 의해 생로병사 즉 개체성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요.
이 무명은 마야라고 해서 불성에 하나의 막을 씌워서 우리의 객체성을 이렇게 획득한다고 그렇게 적혀진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인체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숨을 쉴 때는 사실 소리가 없죠.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성대라는 막을 통해 숨이 나가면 소리가 생기고 그 소리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제가 이렇게 마이크를 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요.
이 가정은 우리가 개체성을 얻는 그런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불가에서 말하는 무명은 우리에게 주어진 제약 만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이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쪽 모두의 모습이 분명히 있다고 알아야지 한 쪽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는 것이 중도 입니다 라기 보다는 중도에 가깝습니다.
불가의 팔정도의 정자나 이 중도에 중자는 표준을 말하기도 하지만 방향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고정돼 있는 것은 아닌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성학이라는 종교는 인생의 방향성에 대한 공부들이 많은데 사실 삶 전체에 연속성을 상정할 때에 생만을 이야기하는게 옳은지 생의 이전과 이후를 말하는 게 옳은지 사실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현재의 생 뿐이니까요.
생이란 범위를 상정하고 나면 일종의 물고기를 잡는 법에 대한 이야기하고 같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물고기를 잡아서 자신의 어망을 채우는 것은 자신들이고 따라서 자신만의 기준과 내용이 있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인 것 같습니다.
자 이제 다음으로는 대학도 입니다.
대학도는 사서의 하나인 대학이라는 책을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권근이 그림으로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유가에서 학문이나 수양은 다른 곳에 수행 수도 공부 이런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대학은 수기 치인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선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이라는 게 옳다 라는 의미 만이 아니라 좋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란 미명하에 끊임없이 윤리나 도덕으로 자신과 타인을 단죄하는 것은 아주 좋지 못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을 주장하면 사람들의 공명을 얻기가 힘듭니다.
아름다움 말처럼 들리긴 하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거든요.
분명히 우리에겐 양심이 있죠.
요즘 예를 들면 저스티스 리그의 플래시는 저스티스리그 양심회로의 역할을 한다고 해요
그렇게 우리 안에는 양심 회로가 있어요.
분명히 있는데 그것은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지우리 모두의 전체, 본성을 대표하는 전체를 지탱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만약 양심과 참나가 완벽하게 같은 의미로 치환된다면 양심이 답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참나가 답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표현되지 않죠.
그래서 이런걸 자기 마음대로 바꿔 봐야 좋지 못해요.
그렇게 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낼 수가 없습니다.
아까 윤리나 도덕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단죄하면 안좋다고 했는데 사실 정신적으로 매우 좋지 않은 짓입니다.
반대로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위태롭듯이 경험하고 돌아보지 않는 것도 위태롭습니다.
그래서 양자 간의 밸런스가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걸 바로 깨어서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과 끝이 경인 것입니다.
수행은 일단 잘 깨어서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면 회광반조가 되고 밖으로 돌려 사물을 접하면 격물치지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드디어 삼강령이 나왔습니다.
삼강령은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그리고 팔조목은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렇게 됩니다.
소설 단의 실존 주인공인 돌아가신 봉우 권태훈 선생님은 재명명덕 재신민 재지어지선을 재명명 덕재신 민재지어지선이라고 이렇게 푸셨습니다.
보통 책에는 자신의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고 지극한 선에 머문다.
이렇게 나오는데 봉우 선생님은 이걸 본래 밝았음을 밝히고 덕은 새로움에 있고 백성을 지극히 선에 머무르게 하는 데 있다고 이렇게 푸셨습니다.
덕은 왜 새로움에 있느냐면 우리는 감각적으로 동일한 자극에 동일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이 공부의 시작이 15살때 소설 단을 보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에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그렇다고 인연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라서 대학 시절에 잠시 이렇게 스쳐가는 인연이였다고 말하기도 참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이유는 봉우 선생님이 못마땅 했던게 아니라 이런 공부를 한다는 곳에 가면 이렇게 늘 정신의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표현할만한 사람들이 버티고 있어요.
그래서 공부에서 저렇게 될 것 같으면 절대 안할것 같은데 이런 마음을 먹게 만드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더구나 이 당시가 군대 갔다 오기 전에 대학생일 때니 왜 이런지에 대한 의문도 사실 풀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알죠.
예 어디든 그럴듯해 보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다 모여 있죠.
그래서 오히려 좋고 가치 있는 곳일수록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서 좋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세상에 뿌리 내리고 살게 도우려면 막무가내 식으로
경제학원론에 등장할만한 단순 논리와 모델로는 안됩니다.
절대로 통하질 않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는 요 삼강령을 자기 방식대로 푸신 봉우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사실 백성을 새롭게 만들다 라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게 푸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렇다면 이 해석은 틀렸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전제와 결론이 충분한 개연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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