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학십도 두번째 서명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읽었을 때 막 그렇게 근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퇴계 이황 자신도 그렇게 못살았고요.
그렇게 사는 사람은 며칠을 살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도 많고 불쌍한 사람도 많고 어려운 사람도 많습니다.
이를 나와 완벽하게 동일시 할 경우에 나라는 존재는 물리적으로는 존속할 수가 없어져요.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은 그런 봄이 보여주는 생명의 피어남과 같은 그런 마음이 본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우리는 그 마음과 접속할 수 있구요.
또 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불가의 용어로 말하면 선입니다.
영어로는 젠이라고 하죠.
서명도는 주된 주제가 이일분수인데 퇴계가 보는 세상과 사람과 사람들의 세상에 관한 생각이죠.
이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에서도 보여지는게 있는데 당시의 세상은 지금 보면 "아 이게 뭐지?" 라고 할 만큼 좀 의아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고대의 세계관에 대해서 이 사람들이 당시 했던 생각들은 확실히 흥미로운 부분이긴 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서명도에 두 문장만 인용하면 이것도 할 말은 다한 건데요.
인용해보면 대개 성인의 학문은 인을 찾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또 인용하면 이 인이 충만하여 가득 채웠을 때 성인이 된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런 마음은 특히 몰입을 통해서 가질 수 있구요.
모릅니다 라는 그런 명상법이나 또는 다른 수행방법을 하셔도 도착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이 인의 마음, 봄의 따스함과 같은 마음이 자신의 마음임을 확인하고 늘 이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수행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과 만물이 천지에서 나왔기에 천지를 부모로 여기는 것 즉 이일 이치가 하나다 라는 것은 성학의 위대한 보편성 입니다.
우리 사회가 여러 가지 병폐와 폐단이 있습니다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 때는 또 놀라운 장점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이 이런 성학이 주는 합리적인 생각의 전통에 있다는 것을 역시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세상의 학문은 이런 분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그러니까 어떻게 다르냐? 라는 부분이죠.
여기에는 각자가 각자대로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이 분수의 이야기를 올바르게 이야기 해 줄 사람이 세상의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명실상부라는 말을 두 번째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소크라테스도 퇴계도 율곡도 분수에 있어서는 각자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저는 그래서 여러분도 여러분 각자의 분수의 이야기가 당연히 있을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또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구요.
다음으로는 세번째 그림 소학도로 넘어가겠습니다.
소학도는 주자가 저술한 소학이라는 책을 퇴계가 도표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소학은 어린 학생들에게 인성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주자가 편찬한 책으로 내용은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학도는 소학의 목차인 입교 명륜 경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림 전체의 흐름은 입교 명륜 경신을 설명하고 이것이 다시 계고를 통해 증명되었다가 다시 가언과 선행을 통해서 확장되는 그런 구조입니다.
이 입교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육덕인데 지 인 성 의 충 화 입니다.
이거는 당장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목표와 방향성을 먼저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육덕은 가령 성령의 9열매라 할 때 그 열매라는 단어나 6바라밀 혹은 10 바라밀에서 바라밀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을 육각형이라고 가정하면 꼭지점에 해당되는 그런 것이죠.
그러니까 사실 6바라밀선이라는게 따로 있다고 하면 이것은 다른게 아니고 틀린게 됩니다.
이런 걸 똑바로 가르쳐주면 사실 제가 굳이 유투브를 안해도 되는데 뭐 어쩔수가 없네요.
하나 더 말하자면 자신의 의견이 바뀔 때 그 전에 의견을 전생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문가로서의 안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 그런 전문가는 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전문가의 양심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주장하는 양심의 세상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구요.
여담이지만 출사표에서 성학십도까지의 일은 일종의 리추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리추얼은 앙굴리마라의 이야기로 끝나게 되는데 이게 끝나면 구운몽에 대한 리뷰를 할 예정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명륜은 오륜을 말하는데 중요한 점은 천지, 음양, 남여처럼 쌍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 모두 쌍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한쪽에서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관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태도가 됩니다.
우리는 종종 어린 시절의 친구가 평생간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느꼈을 때는 평생 가는 관계는 서로에게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는 관계입니다.
그게 안되면 부모 자식도 사실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젊은 친구들이 매사에 좋은 친구 좋은 태도를 가지는 것이 흑수저 금수저를 이야기하기 전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학 전체가 인간의 사회화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사회에서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상하조차도 쌍으로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는 좋은 선배나 상사도 좋은 후배나 부하도 언제나 부족합니다.
결국 늘 선택에 있게 되고 어떤 소속에 일원이 되면 상대적으로 갑의 위치에 서게 되고 또 상대적으로 을이 알 수 없는 정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그렇게 시작이 되는 거죠.
남보다 더 나은 정보를 취집할 수 있다는 건 상대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현실 사회에서는 좋은 태도 올바른 사회화 모두 언제나 무기가 됩니다.
이것은 좀 잊지 마셨으면 하구요.
가끔 이렇게 유튜브를 보다 보면 어린 사람이 박사학위 하나 있다고 젊은 친구들 모아놓고 독한 소리를 마구 늘어놓는 걸 보게 되는데 저런 이야기를 왜 끝까지 듣는지 이해가 안될 때가 많아요 그냥 됐다 라고 말해 주세요.
그리고 유튜브 싫어요 같은 것도 잊지 말고 눌러주시구요.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뭐 얼마나 안다고요.
박사 학위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요.
다음으로는 원형이정 입니다.
저는 책과는 조금 다르게 말을 하는데 봄에 만물이 소생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여름에 성장한다는 것 만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되죠.
만물이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여름에 대응하는 것은 오상의 예와 같습니다.
그리고 가을에 성숙한다고 하지만 가을이 성숙함만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쭉정이와 알곡이 갈리는 선택의 시기이고 그래서 오상의 의에 대응합니다.
그래서 표현은 올바른 표현이란 단어의 제약이 붙게 되죠.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단어 선택을 할 때는 신중하게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와 불이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같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겨울은 완성하는 것을 정이라고 하는데 사실 굳고 곧아지는 것을 말하죠.
생각이라면 수렴되어 질 것이고 모든 일과 사건의 결과로 변하는것 변하지 않는 것이 가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알게 되니까 오상의 지에 대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단에 대해서 말하자면 네이버 옥편으로 단 자를 찾으면 실마리 단이라고 나오는데 굳이 이 실마리 단 이란 말은 틀리고 싹 단 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사단이 네 가지 단서란 이야기인데 싹 이라면 문맥이 올바르게 되고 실마리라는 의미로는 문맥이 안 된다는 말인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엉뚱한 생각들은 같은게... 생각이 다룰 수도 있다 이게 아니고 그냥 틀린 겁니다.
생각이 틀린 거에요.
같다와 다르다 이런 표현으로 사용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말과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양명학의 양지를 양심으로 치환하여 말하면 다른 게 아니라 틀린거죠.
일반적으로 양심은 우리 안에 있는 선량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마구잡이로 말하는 것은 그 학문을 하셨던 분들의 대한 그리고 그런 학문을 이어 오셨던 분들에 대한 존중을 잃은 것이고 그래서 사실 좋은 태도라고도 할 수도 없고 양심적인 일이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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